방 [房]

from 金洙暎 2013.01.13 11:26

방 [房]



김수영,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


비가 그친 어느날 ---- 

나의 방안에 설움이 충만되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고가는 것이 直線으로 혹은 

對角線으로 맞닥드리는 것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 


설움을 逆流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 

아아 그러나 지금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느냐 


흐르는 시간 속에 이를테면 푸른옷이 걸리고 위에

반짝이는 별같이 단추가 달려있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자꾸 뻐근하여만가는 목을 돌려 

시간과 함께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그것은 혹시 한자루의 부채 

--- 그러나 그것은 보일락말락 나의 視野에서 

멀어져가는 --- 

하나의 가냘픈 物體에 도저히 固定될 없는 

나의 눈이며 나의 정신이며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思想마저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있나니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 



(1954)

 



김수영, < 방을 생각하며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메말랐다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노래도 전의 노래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안다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른다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자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없이 풍성하다



(1960.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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