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나 시의 천재를 가지고, 쓰지 못해 발광을 할 때는 세상이란 이상스러워서,청탁을 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런 재주가 고갈되고 나서야 청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무릇 시인이나 소설가는 청탁이 밀물처럼 몰려들어올 때는 자기의 천재는 이미 날아가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일껏 하던 놀음도 멍석을 깔아놓으면 못한다는 말의 `멍석`이 청탁이 되는 예를 글쓰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한번씩은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매일같이, 매달같이 너절한 신문소설과 시시한 글들이 쉴새없이 쏟아져나올수 있겠는가.

 `속물론(俗物論)`의 청탁을 받고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이런 얄궂은 생각과 쓰디쓴 자조의 미소뿐. 도무지 쓰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고, 붓이 철근같아 안 움직인다. 세상은 참 우습다. 그렇게 이를 갈고 속물들을 싫어할 때는 아무 소리도 없다가 이렇게 내 자신이 완전무결하게 속물이 된 뒤에야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고 한다. 세상은 이다지도 야박하다.

 우연히도 어제 우리집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뜰 아래의 헌 재목을 쌓아둔 광의 바깥벽이 며칠 전의 비오던 날 무너져버렸다. 이 헌 재목은 다른 게 아니라 재작년 초겨울에 앞마당 밖의 양계장을 하던 자리에 세운 집이 무허가로 헐려서 뜯어낸 것들이다. 한 백평 가량의 공터를 빌려서 매년 토지세를 내고 양계를 하다가, 그것이 수지가 안 맞아서 여편네의 고안으로 그 자리의 일부에 이십평 가량 줄행랑 비슷하게 하꼬방을 드리고, 세를 주었는데, 땅주인이 노발대발하고 구청에 찔러서, 근 일년 동안을 승강이를 하다가 헐린 것이다. 그 비극의 재목를 처넣어둔 광의, 블록으로 싼 바깥길쪽 벽이 헐린 뒤에도, 바쁘기도 하고 게으르기도 한 우리 부부는 그 담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속에 든 기둥, 널빤지, 문짝, 서까래 부스러기들이썩은 새선뼈처럼 그대로 바깥으로 꿰져나갔다. 단돈 십원에 벌벌 떠는 여편네의 생리로서 이 헌 재목이 아깝지 않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이 재목은 생돈 이십만원을 곱다랗게 손해를 보고 남은 원한의 유산(遺産)이다.

 그 재목이 하루 이틀 지나는 사이에, 예측한 대로, 도난을 당했다. 그중에서 제일 값진 현관 문짝부터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리들은 그 담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들은 웃고만 있었다. 개가 짖어도 나가보지를 않았고, 나가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 친구 Y가 집을 증축하겠다는 말을 듣고 우리집 재목을 갖다 쓰라고 했다. 이 친구가 어제 이 재목을 가지러 왔다. 그래서 우리집에서 삼십리 가량 떨어진 금호동까지 재목을 싣고 갈 인부를 얻지 않으면 이니 되었다. 여편네는 우리 동네에서 그중 가난한 아무개 아버지를 불러왔다. 한 리어카가 잔뜩 되는 나무를 골라내고 나니, 광이 허술해지고 통로까지 생기었다. 이 통로를 메우게 하려고 광 밖에 세워두었던 나무기둥들까지 집어넣어서 엉성하게 밖으로 난 구멍을 메우게 하고, 임시로 담이 헐린 곳에 가시철망을 치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아무개 아버지가 가시철망은 치지 않아도 된다고 한사코 반대한다. 여편네는 자꾸 치라고 명령을 한다.

 그러다가 몇차례 옥신각신을 한 끝에 아무개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주인의 명령에 못 이겨서 가시철망을 친다. 그러자 바깥길에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서 구경을 한다. 그 아이들 중에는 이 아무개 아버지의 어린애들도 끼여 있다. 그런데 이 아무개의 아버지의 어린애의 손을 잡고 있는 옥색 스웨터를 입고 있는 처녀아이가 며칠 전에 나무를 빼가고 있는 것을 나는 우연히 창너머로 본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이 아무개 아버지가 수상하다고 생각한 일이 있던 나의 의심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그래서 유심히 이 아무개 아버지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래서 유심히 이 아무개 아버지는 별안간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면서 자기의 어린것들과 옥색빛 스웨터의 처녀아이를 가라고 쫓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철망을 다 쳤다고 해서, 부엌 뒷문을 열고 나가보니 꿰어져나온 생선뼈의 한 귀퉁이에 쳐놓은 철망은 단 두 줄. 그것은 대포를 들고 오는 도둑에게는 거미줄만한 역할밖에는 못할 정도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이 아무개 아버지가 재목을 싣고 간 뒤에, 혼자서 부너져 부서진 블록 토막을 주워 모아가지고, 거미줄 밑에다 엉성하게 쌓아올렸다. 이것은 도둑을 막거나, 도둑에게 호통을 치기 위한 방폐라기보다는, 도둑에게 애소하는 눈물의 제스처다. 물론 이런 허약하고 비겁한 제스처가 -그것이 아무개 아버지이든 누구이든간에-도둑에게 통할 리가 없다.

 이런 어리석은 어제의 경험이, 속물론을 쓸 자격을 이미 상실하고 고민하고 지친 나의 머리에, 아주 아득한 옛날의 기억처럼 아물아물 떠오르는 거시 신비스럽기까지도 하다. 이렇게 지나치게 서론이 길어진 것도 역시 속물론을 쓰기 싫은 심정의 서투른 지연작전이라고 생각해주면 된다. 나를 보고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는 것은 아무개 아버지를 보고, 자기가 도둑질을 한 집의 담에 가시철망을 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보다 더 어색한 일이 없다.

 우선 나는 지금 매문(賣文)을 하고 있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속물 중에도 고급 속물이 하는 짓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매문가의 특색은 잡지나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가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입으로야 물론 안 그렇다고 하지.그 까짓 것, 그저 담배값이나 벌려고 하는 거지. 혹은 하도 나와달라고 귀찮게 굴어서 마지못해 나간 거지, 입에 풀칠을 해야 하고, 자식새끼들의 학비도 내야 할 테니까 죽지 못해 하는 거지, 정도로 말을 하지.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만도 아닐걸....그런 것만도 아닐걸.

 그러다가보면 차차 돈도 생기고, 살림도 제법 안정되어가고, 전화도 놓고, 텔레비도 놔야 되고, 잡지사나 신문사에서 오는 젊은 기자들에 대한 체면이나, 다음 청탁에 대한 고려를 해서도, 다락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헌잡지 나부랭이나 기증받은 책까지도, 하다 못해 동화책까지도, 말끔히 먼지를 털어서 비어있는 책꽂이의 공간을 메워놓아야 한다. 그리고 베스트쎌러의 에쎄이스트로 유명한 A,B,C의 뒤를 따라 자가용차를 살 꿈을 꾸고, 펜클럽 대회가 빠리와 미국에서 언제 열리는가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악덕은 누차 말해두거니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전법을 바꾸었다. 이왕 도둑이 된 바에야 아주 직업적인 도둑놈이 되자. 아무개 아버지 같은 좀도둑이 아니라, 남의 땅에 허가없이 집을 짓는 아무개 아버지가 도둑질을 한 집의 주인 같은 날도둑놈이 되자. 그래서 하다 못해 무허가의 죄명으로 집을 헐리고 때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편이 낫다. 그 편이 훨씬 남자답고 떳떳하다. 즉, 나다.

 이 내가 되는 일, 진짜 속물이 되는 일, 말로 하기는 쉽지만 이 수업도 사실은 여간 어렵지 않다. 속물이 안되려고 발버둥질을 치는 생활만큼 어렵다. 그리고 그만큼 고독하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고독은 나일론 재킷이다. 고독은 바늘끝만치라도 내색을 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고 탈락한다. 원래가 속물이 된 중요한 여건의 하나가, 이 사회가 고독을 향유한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물이 된 후에 어떻게 또 고독을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속물은 나일론 재킷을 입고 있다.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은 고도의 재킷을 입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재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이 글 제목대로 `거룩한 속물` 즉 고급속물의 범주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고독의 재킷을 입지 않은 것은 저급속물이지 고급속물은 아니다. 고급속물은 반드시 고독의 자기의식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규정을 하면 내가 말하는 고급속물은 자폭(自爆)을 할 줄 아는 속물, 즉 진정한 의미에서는 속물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아무래도 나는 고급속물을 미화하고 적당화시킴으로써 자기변명을 하려는 속셈이 있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초(超)고급속물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심연(深淵)은 무한하다. 속물을 규정하는 척도도 무한하다.

 속물은 어디에 있는가. `거룩한 속물`은 어디에 있는가. 양서점(洋書店)에 있는가. 양서방의 주인은 일본 고본옥(古本屋)의 주인에 비하면 어디인지 모르게 거만하다. 양서방의 카운터에 타이프라이터를 놓고 앉아 있는 좁다란 바지통의 사나이의 그 야무진 눈동자, 우리들은 이 배미사상(拜美思想)의 눈동자를 오늘의 지성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가. 그의 눈동자에는 나일론 재킷이 씌어져 있나. 혹은 신간 양서를 진열해 놓은 외국 대사관 도서실의 카드상자 앞에 앉아 있는 청년과의 대화, 지성적인 청년에게, ``제임즈 볼드윈의 <조바니스 룸>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봐 보아라. 그는 대뜸 경멸하는 표정으로 변하면서, ``여기에는 `<제임즈 본드>같은 저급한 책을 보여주는 데가 아닙니다``하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실제 얼마 전에 내가 당한 일이다. 이말을 듣고 ``네 그렇습니까``하고 그대로 물러나왔더라면 멋이 있었던 것을 원래가 고급속물도 저급속물도 아닌 나는, 내가 찾고 있는 책이 `저급한 제임즈 본드`가 아니라 `고급한 제임즈 볼드윈`이라는 설명을 누누이 해주었다. 청년은 다시 발끈 화를 내면서, ``그런 이름은 모르니까, 저 카드서랍을 찾아보세요!`` 물론 카드서랍에 <어너더 컨트리>를 쓴 흑인작가의 옛날 소설 이름이 들어 있을 리가없다. `B`자의 서랍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도 볼드윈의 옛날 소설은 커녕 그의 근간 저서도 없고, 도데체가 정치가나 경제학자나 신학자나 드레스 메이커의 `볼드윈`도 없다. 이것은 도서관이 속물일 뿐만 아니라, 도서관 자체가 거룩한 속물이다.

 속물의 특성은 겸손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에서도 얼마 전에 십일층인가의 고층건물을 지은 사람을 상대로 그 건물 뒤에 사는 사람이 햇빛을 막아서 그늘이 진다는 피해로 오랫동안 소송을 걸었다가 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인이라면 옆의 집에 그늘이 지는 것을 보고 집까지 헐 용기가 없더라도 미안한 생각쯤은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신문소설가나 방송작가들을 보면 그늘이 진 옆의 집에 미안한 생각을 품기는커녕, 왜 나만큼 큰 집을 못 짓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쓰레기와 오물까지도 아침저녁으로 내리쏟는다. 유독 신문소설가나 방송작가뿐이 아니다. 이런 그레셤의 법칙은 문화단체와 예술단체의 이름으로 교수의 이름으로 학장의 이름으로 아나운서의 이름으로 신문기자의 이름으로 날이 갈수록 더 성해가기만 한다. 유능한 아나운서와 유능한 사회자는 대담자나 회담자나 청중을 리드해 간다는 미명으로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이다. 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 잡아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 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大制度)는 지옥이다. 이 지옥 속의 레슬러들이 속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속물이다. 아무것도 안 붙인 가슴보다는 지옥의 훈장이라도 붙이고 있는 편이 덜 허전하다. 하나님이시여, 이`테리어`종들에게 구원을!

 구원의 무대를 바꾸어놓아야 한다. 사회자가 나쁜 게 아니라 사회자가 서 있는 자리가 나쁘다. 사회의 연단과 마이크의 위치를 관중의 뒤쪽에 놓아야 한다. 관중이 안보이는 곳에. 그러나 시끄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한 놈이 하던 목소리가 관중이 안보인다고 사회자가 수시로 바뀌더니 나중에는 사회자가 관중보다 더 많아진 나라가 있다. 이것을 고치려고 어떤 나라에서는 천장에다 사회석을 만들기도 하고, 마룻바닥 밑에다 유리를 깔고 집어넣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천장과 마룻바닥 밑은 관중의 고개가 너무 아프다고 해서 다시 끌어내려서, 이번에는 사회자를 중심으로 하고, 다시 옛날의 약장수나 요술쟁이들이 하는 식으로, 둥그렇게 모여 앉도록 했다. 민주주의의 방송망과 텔레비망이다. 그러나 속물들은 여전하다. 하지만 일루의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모두 다 속물을 만들어라. 모두 다 유명하게 만들어라. 간판이 너무 많은 종로나 충무로 거리에서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 저 간판을 늘려라. 하나님은 오늘날의 속물의 근절책으로 이 방법을 시험하고 있고,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

 쓰기 싫은 글을 억지로 여기까지 쓰고 나니 피곤하기만 하다. 하기는 피곤을 느끼는 것도 하나의 약이다. 미국의 오늘의 모든 폐해는 이 피곤을 모르는 데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을 흉내내기 시작한 지 아직 얼마 안되는 우리들은 언제 피곤을 배울까. 우리들은 아직도 배가 고픈 단계에 있다. 피곤도 배를 제대로 채우고 나서야 느끼게 될 것이니까. 앞으로도 한참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친구들 중에는 라디오 드라마와 유행가를 거의 도맡아 쓰고 있는 친구로 속물을 극복한 위대한 속물이 있다. 신문의 역사소설을 근 십권이나 쓴 선배 중에도 이런 분이 있다. 이쯤 되면 속물도 애교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나일론 재킷을 분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고, 어찌나 시간이 걸리는지, 요즘에는 그 감별까지도 포기하고 있다. 이제 나도 진짜 속물이 되어가나보다. 

 

 (동서춘추 1967년 5월호)
 


'金洙暎'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령(死靈) _ 김수영  (2) 2012.04.04
"이 거룩한 속물들"- 김수영  (0) 2012.03.21
김수영 일기초  (1) 2012.03.08
김수영 시인 탄생 90주년 - <구름의 파수병>  (2) 2011.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