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들어 '부음'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리고 전과 달리 '죽음'을 생각하는 빈도가 잦다.
죽음은 원래 일상적으로 늘 일어나는 것이었는데
내가 나이가 들어가는 이유로 새삼스레 체감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죽음에서 '두려움' 보다는 '평안'을 발견하려는 의지가 발동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내 지난 시간들의 총체로부터 부지불식간에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던 중 오늘, 뭉클 님의 블로그에서
까맣게 잊고있었던 김수영의 이 글을 발견하였다.
뭉클님 고맙습니다.^^

올올이 저며드는 글이다.
아...
 


얼마 전만 해도 나의 시에 연애시가 없다고 지적하는 친구의 말에 무슨 죄라도 진 것 같은, 시인으로서의 치욕감을 느끼고는 했지만 이제는 그런 콤플렉스나 초조감은 없다. 박용철의 <빛나는 자취>같은  작품들이 보여주는 힘의 세계가 이성의 사랑보다도 더 크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이미 종교의 세계에 한쪽 발을 들여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자를 그냥 여자로서 대할 수가 없다. 남자도 그렇고 여자도 그렇고 죽음이라는 전제를 놓지 않고서는 온전한 형상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눈으로 볼 때는 여자에 대한 사랑이나 남자에 대한 사랑이나 다를 게 없다. 너무 성인 같은 말을 써서 미안하지만 사실 나는 요즘 이러한 운산(運算)에 바쁘다. 이런 운산을 하고 있을 때가 나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나의 여자는 죽음 반 사랑 반이다. 나의 남자도 죽음 반 사랑 반이다. 죽음이 없으면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죽음이 없다. 시에 다소나마 교양이 있는 사람이면 나의 이러한 연애관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키츠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실제의 체험에서 배운 것이니까 어디까지나 나의 것이다. 새로운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나의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징조인지는 몰라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빈도가 잦아진다. 모든 것과 모든 일이 죽음의 척도에서 재어지게 된다. 자식을 볼 때에도 친구를 볼 때에도 아내를 볼 때에도 그들의 생명을, 그들의 생명만을 사랑하고 싶다. 화가로 치면 이제 나는 겨우 나체화를 그릴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잘하면 이제부터 정말 연애시다운 연애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쓰게 되면 여편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쓸 수 있는 연애시를, 여편네가 이혼을 하자고 대들 만한 연애시를, 그래도 뉘우치지 않을 연애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 김수영 산문집 中 '나의 연애시' 1968






이어, 위 글에 언급된 박용철 시인의 <빛나는 자취>를 옮겨놓는다.



빛나는 자취
 

따숩고 밝은 햇발 이같이 내려 흐르느니
숨어 있던 어린 풀싹 소근거려 나오고
새로 피어 수줍은 가지 위 분홍 꽃잎들도
어느 하나 그의 입맞춤을 막아보려 안합니다.

푸른 밤 달 비친 데서는 이슬이 구슬되고
길바닥에 고인 물도 호수같이 별을 잠급니다.
조그만 반딧불은 여름밤 벌레라도
꼬리로 빛을 뿌리고 날아다니는 혜성입니다.

오 - 그대시어 허리 가느단 계집애 앞에
무릎 꿇고 비는 사람을 버리옵고
몸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사나이가 되옵소서

고개 빠트리고 마음 떨리는 사람을 버리옵고
은비둘기같이 가슴 내밀고 날아가시어
다만 나의 흐린 눈으로 그대의 빛나는 자취를 따르게 하옵소서.

- 박용철